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감나무의 조문-이호준-

불량아들 2018. 11. 26. 14:56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65)



감나무의 조문

이호준(1958~ )

 

혼자 살다 먼 길 떠난 길안댁

비탈밭에 묻고 오니

대문 옆 늙은 감나무

늦은 조등 켜놓았다

붉은 눈물 그렁그렁 내달았다

 

그녀,

그동안 혼자 산 게 아니었구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65번째 시는 이호준 시인의 감나무의 조문입니다.

 

며칠 전 신문엔 성공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한 영화인에 대한 기사가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가 음주 운전의 희생양이 됐던 한 젊은이의 죽음도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서 이렇게 똬리 틀고 있지만 어떤 삶이 성공적이었고 어떤 죽음이 값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합니다. 삶과 죽음은 어느 것보다도 고귀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숭고한 삶은 인류를 위해서 희생한다거나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 말고도 우리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배고픈 이웃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눠주거나 가을 낙엽을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거나 치매 걸린 부모님을 극진하게 간호하는 자식 등등의 삶을 값지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개의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왔고 우리는 이런 연유 때문에 삶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 살다 먼 길 떠난 길안댁으로 대표할 수 있는 필부의 죽음늙은 감나무붉은 눈물 그렁그렁 내달늦은 조등으로 조문합니다. 세상에 내놓을 업적(?) 없이 살아온 길안댁이지만 대문 옆 늙은 감나무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압니다.

 

그녀는 먼저 떠난 지아비를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식들의 안부 없음도 나무라지 않았을 것이고 굽은 허리로 외양간의 소똥을 감나무 밑에 뿌려주었을 것입니다. 동네 개구쟁이들에게는 사탕도 하나씩 꺼내주었겠지요. 집 뒤 조그만 비탈밭은 풀 한 포기 없이 관리했겠지요. 밭이나 논에 풀이 많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흉본다고 말하며...

 

그녀의 삶은 이렇게 소박했지만, 우리는 그녀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동안 혼자 산 게 아니었음을 감나무가 켜놓은 조등은 여실히 증명해주네요.

 

붉은 눈물 그렁그렁에서 시인의 마음을 다시 읽습니다. 시는 짧고 시인의 마음은 깊고도 깊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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