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열매론-이향란-

불량아들 2020. 11. 27. 14:05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9)

 

열매론

이향란(1962~ )

 

익었다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꽃의 시간을 지나 하나의 열매가 영글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땅을 향해 툭, 온몸을 던질 때 열매는 이미 두려움을 잊을 만큼 연약한 가지에 매달린 생에 익숙해진 것이다 모진 바람과 따가운 햇볕과 온갖 벌레로부터

 

산책을 하다가 이름 모를 나무에 빼곡히 매달린 작은 열매를 본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빨갛게 열매로 타오르는 것들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모으거나 새나 벌레의 먹이가 되거나 이도저도 아닌 시간 속에 머물다 떨어질지라도 열매는 두려움이 없다 이름 없는 나무의 열매로 맺히기까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과로 마지막을 장식할지라도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뛰어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익었다는 것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9번째 시는 이향란 시인의 “열매론”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온갖 만물의 목표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자손일 수 있으며 부, 명예, 권력, 행복, 진리 등 사람마다 다양하게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잎을 만들며 뿌리를 통하여 온갖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데, 그 같은 활동이 결국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열매는 후대를 잇기 위한 노력의 산물일 뿐 아니라 식물이 생존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한 고군분투의 삶의 총합, 이것이 나무를 포함한 식물의 존재이유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룩한 결과물, 열매!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의 시간을 지나”고 “모진 바람과 따가운 햇볕과 온갖 벌레”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것들에 “익숙해”지고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열매는 땅으로 “뛰어내”려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됩니다. “익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 많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계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떨어진 열매가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시의 영향이 아닐 런지요.

 

우리 삶을 다시 한 번 반추케 하는 이향란 시인의 “열매론”이었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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