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7)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1962~ )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 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 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7번째 시는 안상학 시인의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입니다.
필자가 충무로 사무실에서 돈암동의 집까지 걸어서 퇴근을 한 지도 어언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여유를 부리며 걷다가 성북천이 만나는 곳에서 성북천으로 옮겨 걷는 맛이 제법 쏠쏠합니다. ‘걸으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걷고 있습니다.
지난 해 2월부터 걸으며 새삼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어떻게 키우고 분가시키는지, 왜가리가 하천의 제왕이 된 이유, 물살은 물길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바람도 맛이 있다는 것 등등.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계절을 오롯이 온몸으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계절이 순환하는 것만 알았지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며 살지는 못했었습니다. 걸으며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을 때의 행복함은 그 무엇 이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생각 없이 걷는 시간이 제일 많았던 것 같습니다. 터벅터벅 걸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재미, 경험자만이 알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무심하게 걷다보면 역으로 많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지나온 추억을 반추하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질문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걸으며 얻은 교훈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삶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은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렇게 “뿌리내린 듯 기다”리면 언젠가 “그 사람은 돌아오”겠지요, 희망처럼...
삶이 혼란스럽고 복잡할 때 이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 큰 위안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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