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뜨듯한 시-오민석-

불량아들 2017. 1. 26. 10:52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44)

 

뜨듯한 시

-오민석(1958~ )

 

뒷마당에 나가니

저녁 무렵 시작된 눈이

이 새벽까지 내리고 있다

문득

뜨듯한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지붕 위에서 바람에 밀린 눈 무더기가

후두두 내 어깨를 덮으니

참담한 마음의 피로까지도

빼앗아 갈 정도로 황홀한 거다

나도 한때

아름다움에 눈먼 시절이 있었다

서해 송정리 해변의 목선(木船) 위로 지던 노을

새벽 지리산 천왕봉에서 내려다보던 푸른 산주름들

아드리아 해안의 바다 오르간 소리

보일 듯 말 듯 넘실대던 애인의 눈부신 젖무덤

나도 한떄

아름다움에 나를 던지고 그만 뻗어버리고 싶던 시절이 있었던 거다

그러나 지금 잠 못 이루는 새벽

눈 내리는 처마 밑은 세월의 더께가 무성하여

그리로 몸 던지기가 만만치 않은 거다

쌓이는 눈 위로

시루떡처럼 생계가 하나씩 포개지는 거다

누군가는 제 손으로 세상을 하직했고

누군가는 아이를 잃었다

누군가는 이 시간에 예배당 제일 앞자리에

홀로 무릎 꿇고 있는 거다

눈 내리는 새벽

모처럼 뜨듯한 시를 쓰려던 나의 계획은

이리하여 또 수포로 돌아갈 거다

그래도 나는 이승의 피로를

가만히 눈발 위에 내려놓는다

그 위에 금방 쪄낸 백설기처럼

김 풀풀 내며 눈이 쌓이는 것을 보는 거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내가 하는 모냥을 다 지켜보며

가만히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보는 거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44번째 시는 오민석 시인의 뜨듯한 시입니다.

 

시를 비롯한 예술작품의 효용성은 얼마나 될까요? 시는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의 값어치가 있을까요? 시인들은 언제 시를 쓰고 싶어 할까요? 오민석 시인의 뜨듯한 시를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저녁 무렵 시작된 눈이/ 이 새벽까지 내리고 있다면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당연하게 시를 쓰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것도 뜨듯한 시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눈 오는 풍경은 사람들에게 황홀감과 함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눈먼 시절을 상기시키며 그 시절로 회귀하는 마력. 그러나 한편으로 눈은 마냥 아름다운 감상만으로 우리를 놔두지 않습니다. ‘세월의 더께가 무성하리만치 나이를 먹은 지금은 쌓이는 눈 위로/ 시루떡처럼 생계가 하나씩 포개지는것과 눈의 무게는 같습니다. ‘세상을 하직한 사람, ‘아이를 잃은, ‘홀로 무릎을 꿇고 있는사람이 눈 내리는 새벽에 생각나는 것은 나이 탓일까요, 세상 때문일까요?

 

연륜 탓이든 세상 때문이든 아름다운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이제 접어야 합니다. 대신 이승의 피로를/ 가만히 눈발 위에 내려놓는다든지 금방 쪄낸 백설기처럼/ 김 풀풀 내며 눈이 쌓이는 것을 보는 거로 위안을 삼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생의 이면을 생각해야 하는 아이러니! 그게 시인의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웃들 생각에 뜨듯한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버렸지만, 아니 쓰지 못하지만 가만히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보는 거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테니까요.

 

아름다운 시를 보면 왜 우리는 웃지요?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인 대표 겸 편집국장)

<미용회보M> 201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