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내가 읽은 시 2006.04.05
좋은 풍경 -정현종-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내가 읽은 시 2006.04.03
한잎의 女子 1 -오규원- 한잎의 女子 1 -언어는 추억에 걸려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내가 읽은 시 2006.04.03
사는 이유 -최영미-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 내가 읽은 시 2006.04.03
서울역 그 식당 -함민복- 서울역 그 식당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내가 읽은 시 2006.04.03
벚나무는 건달같이 -안도현- 벚나무는 건달같이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女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가네 내가 읽은 시 2006.04.03
파꽃 피었다 -이문재- 파꽃 피었다 파가 자라는 이유는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튼실할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다 자란 파는 속이 없다 사람들은 파 속을 먹지 않는다 내가 읽은 시 2006.04.03
엄마 걱정 -기형도-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 내가 읽은 시 2006.04.03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 내가 읽은 시 200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