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 생각 하루살이 생각 화장실에 앉아서 볼일을 보다가 갑자기 변기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면, 불손한 생각 유명시인이 보내온 신간시집 속에 내 시가 떡하니 박혀 있다는 오만한 생각 견종이 같은 우리 집 개와 그대 집 개가 바뀌지 않았을까, 억울한 생각 가을 은행잎이 황금동전이었으면, 배짱 큰 생각 머릿속 지식이 사는 데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허망한 생각 하루살이 생각은 얼마나 오래갈까 생각은 깊고 생활은 짧네 2024년 1월호 자작시 2024.01.05
문득, 문득,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세계지도를 머릿속에 새겨야겠어 -하루를 그렇게 시작해야겠어 아내의 한마디 말 툭 던진 이 한마디 말 불교의 경전 교회의 성경 무함마드의 코란보다 쪼잔한 내 마음을 꾸짖고 있는데 때마침 책상 위의 지구본이 23.5로 기울어진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2023년 12월호 자작시 2024.01.05
가벼운 것에 대하여 가벼운 것에 대하여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는 벤치 머리가 하얗게 빛나는 할아버지 두 분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커피 줄이 선명한 종이컵을 든 두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다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긴 시간이 흐른 듯하다 손자뻘 되는 사내애가 아차, 하는 사이 푸른 풍선을 허공에 날렸다 대롱대롱 가볍기만 하다 날아가는 것과 떨어지는 것은 모두모두 가볍다고 한 할아버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낙엽이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는 벤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2023년 11월호 자작시 2024.01.05
각자도생 각자도생 아내는 전자저울에 조심스럽게 오르며 1키로나 쪘다고 안타깝게 눈으로 말한다 딸은 약속시간에 늦었다며 현관문을 닫지도 않은 채 나가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이 화면 가득하다 비가 온다는데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집안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2023년 10월호 자작시 2024.01.05
긴말이 모든 것을 말하진 않는다 긴말이 모든 것을 말하진 않는다 -정두심 부산 금정구지회장 -국장님 건강하시지예 -거기도 날씨 좋지예 -그냥 전화했심더 그렇다 살아가는데 주저리주저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은 그냥 알아주는 법이라고 부산의 멋쟁이 한 미용인은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구절절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살이 -됐다마 부산의 멋쟁이 미용인 이 한마디 세상의 불협화음 다 이해시키기도 하고 잘 사는 길 잘 가르치기도 하고... 하늘나라에서도 잘 지켜줄 것이지예 2023년 8월호 자작시 2024.01.05
나무송(頌) 나무송(頌) 내 몸 하나가 네 몸 한 점이 되더라도 내 그늘이 네 양지가 될 때까지 헐렁한 구두 뒤축에서 빨아올리는 물의 몸 네게 이로움이 되리 연필과 종이가 되리 마지막엔 재로 남은 아버지 무덤 같은 2023년 7월호 자작시 2024.01.05
고요 혹은, 고요 혹은, 술 취한 사내가 서글픈 저녁, 비틀비틀 과일 한 봉지를 들고 간다 달빛이 창가를 비추고 두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다 고요만이 압도하고 있는 세상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다 2023년 6월호 자작시 2024.01.05
로또 로또 어젯밤 꿈이 상서롭다며 아내가 출근길에 로또를 사려다 그만둡니다 -아니 왜? -내 생에 한 번이면 돼. 두 번은 욕심이야 아내의 말에 신랑은 하늘을 납니다 2023년 5월호 자작시 2024.01.05
4월이 3월에게 4월이 3월에게 웬 설움이 그리 많다고 마을마다 연등을 걸어놓았뇨 저 짝 매화는 여즉 몸서리 치고 있는데 개나리는 샛노란 힘을 모으고 있는데 가지마다 생살 트고 있는데 함성으로 깃발로 내몰고 있느뇨 못 다한 이야기 조용하게 내밀하게 전해줄 것이려니 내몰지 말지어다 서두르지 말지어다 내 시간이 오면 다 거둘지니 2023년 4월호 자작시 202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