放心 -손택수-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 내가 읽은 시 2006.08.21
농촌 노총각 -함민복- 농촌 노총각 함민복 달빛 찬 들국화길 가슴 물컹한 처녀 등에 업고 한 백 리 걸어보고 싶구랴 *"세상엔 시인이 둘 있다. '함민복'과 '그 밖의 시인들'"이라고 말하는 함민복 시인의 말을 듣고 홍소(哄笑)를 터뜨린 적이 있다. 대개 동종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칭찬에 인색한 법이다. 같은 '시.. 내가 읽은 시 2006.06.29
여름날 -김사인- 여름날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 내가 읽은 시 2006.06.24
꽃 상여 -박성룡- 꽃 상여 홀가분 하여라 홀가분 하여라 이 세상 떨치고 가는 길 눈부시게 홀가분 하여라! 봄의 입김도 뿌우연 밭두덩 논두덩 길 푸른 잔디 푸성귀밭 사잇길로 바람결 헤쳐 헤쳐 老松林도 굽이 돌아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다신 오진 않을란다! 홀가분 하여라 홀가분 하여라 둥 둥 둥 눈부신 꽃상여 이 세상.. 내가 읽은 시 2006.04.21
물 桶 -김종삼- 물 桶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桶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내가 읽은 시 2006.04.21
북 치는 소년 -김종삼- 북 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내가 읽은 시 2006.04.21
고향 -김종삼- 고향 예수는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떻게 죽었을까 줄을 때엔 뭐라고 하였을까 흘러가는 요단의 물결과 하늘 나라가 그의 고향이었을까 철 따라 옮아다니는 고운 소릴 내릴 줄 아는 새들이었을까 저물어가는 잔잔한 물결이었을까 내가 읽은 시 2006.04.21
잠지 -오탁번- 잠지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 내가 읽은 시 2006.04.11
여승(女僧) -백석 여승(女僧)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 내가 읽은 시 2006.04.10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 내가 읽은 시 200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