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열전 나무 열전 학 한 마리 소나무 위에 앉아 있다 자태 늘름하다 나무야 나무야 소나무야 뛰어나지 말지어다 옆 나무만큼 꼭 그만큼만 옹기종기 키 맞추고 나란히 열 짓자꾸나 나대는 태풍에도 오순도순 기대자꾸나 노을 지자 학 한 마리 늘름한 소나무 박차고 날아간다 <뷰티라이프> 2019.. 자작시 2019.08.26
장미 장미 뼛속 가슴 속 참아왔던, 응어리 덩어리 덩어리 콱, 콱 토해놓고 작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흔들리며 향기 퍼뜨리는 <뷰티라이프> 2019년 7월호, 창간 20주년 기념호 자작시 2019.08.26
늙은 시인의 노래 늙은 시인의 노래 늙은 시인이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다 들고 있던 책을 툭 떨어뜨리기도 한다 세상은 장마철의 구름처럼 빨리 흐르고 풀 수 없는 암호마냥 글자들은 춤춘다 늙은 시인은 아이가 보고 싶다, 아니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얀 혀로 새로운 세상을 맛보고 뒤뚱거리는 발걸음.. 자작시 2019.08.26
잠자는 아내 잠자는 아내 머리 희끗해진 아내가 잠들어 있다 가끔씩 표정으로 말도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얼굴에 살아온 날들이 녹아 있다 교복 입은 계집아이 희망도 꿈도 많았을 터 빚질 일 없고 빚 줄 일 없는 고만고만한 삶 남 얘기하지 않고 남 얘기 듣고 싶지 않은 평탄한 삶 지금도 그런 꿈을 .. 자작시 2019.08.26
3월 새싹 3월 새싹 날 듯 말 듯 입은 듯 만 듯 새색시 미소처럼 보일 듯 말 듯 세상에서 가장 쪼매한,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혁명 <뷰티라이프> 2019년 4월호 자작시 2019.08.26
지난 겨울 지난 겨울 겨울 햇볕은 자지러지게 그 기운을 양지쪽에만 쏟아 붓고 있었다 -죄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뒷산에서 갈참나무는 부르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소곤대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새로 난 길로 차들이 짐을 가득 싣고 들어오고 있었다 <뷰티라이프> 2019년 3월호 자작시 2019.08.26
그들의 잔치 그들의 잔치 그들은 또 모였다 큰아들은 워싱턴에서 왔고 큰딸은 벤쿠버에서 왔다 둘째아들은 전국을 떠돌다오고 집을 지키고 있는 막내만 손길이 분주했다 삶은 이렇게들 모여서 수상한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학을 졸업하거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들에 대해 조심조심 얘기했.. 자작시 2019.08.26
고장난 면도 고장 난 면도 옛 애인이 선물해준 전기면도기가 고장 났다 사랑도 고장 날 수가 있는가? 오늘 아침엔 일일면도기로 수염을 민다 천천히 천천히 깎으면 되건만 고장 난 하루를 복원하듯 허둥지둥 서두르다 아뿔싸, 쓰라린 피 상처를 되돌려놓을 수 없듯 옛 사랑도 되돌려놓을 수 없듯 붉은 .. 자작시 2019.08.26
인타임 인 타임* 시간을 삽니다 당신의 인생을, 당신의 쾌락과 고통까지도 삽니다 시간+시간 시간-시간 시간을 사는, 시간을 파는 지금 이 시간에도 시간은 흐르는데 당신의 시간을 몽땅 삽니다 시간 부자인 나는 당신에게 시간을 나눠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도 나는 시간을 더 사야 하니까요 이 .. 자작시 2019.08.26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 명치 시린 가을 하늘 고추잠자리 몇 마리 엉덩이를 흔들자 천지가 원을 그리며 붉어지고 있다 태초부터 그러하였다 한다 <뷰티라이프> 2018년 11월호 자작시 2019.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