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울다 같이 울다 지하철 내려가는 계단 할아버지 한 분이 철 손잡이를 잡고 조심조심 내려오다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진다 고통이 얼굴에 퍼지고 입으론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급히 달려와 도와주며 할아버지를 가만히 보시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허리통증으로 119에 실려 간 적이 있던 나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날이었다 2022년 5월호 자작시 2024.01.04
M의 외출 M의 외출 M은 새벽에 일어났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거실로 나오자 창밖으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검은 외투를 걸치고 아파트 문을 나섰다 고고한 달빛이 내리쬐는 돌담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빤히 노려보았다 길 위를 새벽바람이 뒹굴며 지나갔다 몇 번의 심호흡이 M의 심장을 자극했다 낚싯줄과 물고기의 팽팽한 대치처럼 그는 여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게 부질없는 짓, 속으로 되 뇌이며 뒹구는 바람을 앞서 걸었다 마침내 골목 끝에 다다랐으나 골목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다 좁은 골목 어둑한 허공 속에서 침을 한번 삼키고 깃을 세운 야생마처럼 가던 길을 되돌아서 달렸다 고양이 두어 마리가 혼비백산 담 위를 넘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고 M은 생각했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 자작시 2024.01.04
효자론 효자론 여섯 살 꼬맹이 엄마 아빠 손잡고 앙증앙증 토끼 걸음으로 옷가게 들어왔네 엄마는 봄날 닮은 잠옷이 마음에 드는 모양 가격 보고 아빠 눈치 살피네 앙증앙증 꼬맹이 -엄마 내가 사줄게 -아빠 카드 줘 가게 안, 환한 웃음으로 봄을 부르네 2022년 3월호 자작시 2024.01.04
탄생 탄생 흑백 텔레비전 속 근육 불끈 솟은 저 사내 달군 쇠를 잘도 요리한다 두드리고 오므리고 뒤집고 땀이 송송 불빛 담은 밥그릇 오롯이 빛을 발하네 빈다 어머니, 눈 내리는 장독대 정한수 채워 놓고 모난 자식 둥글게 둥글게 비비고 비비고 또 비비고 외양간 송아지 예쁘게도 태어났다 2022년 2월호 자작시 2024.01.04
그대 오는 날 그대 오는 날 누군가 몹시 그리운 비 오는 날 빗방울에 그리움 날려 보내는 지난한 일 그대는 알 일 비가 아니면 눈이었다고 낙엽이었다고 우겨도 볼 일 오늘은 비도 아니 오고 눈도 아니 오고 꽃도 피지 않는 그런 날 그대만이 울음 삼키며 오는 날 2022년 1월호 자작시 2024.01.04
생각을 멈추다 생각을 멈추다 단 삼 일만의 생 느껴야 할 시간도 버려야 할 욕심도 없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가을바람에 혼령은 자유롭던가 아가아가 뻐꾹새만 목 세워 운다 지나온 세월이 유수 같구나 모레면 한 세기 세월을 잡을 올가미는 없는가? 마른 눈물만 땀으로 흐르는데 먹구름 속에도 푸르름은 보이는 듯 노랑 꾀꼬리 까불어 쌓는다 삶과 죽음이 시공을 넘나드는 생각을 멈춘 여기 이곳 2021년 12월호 자작시 2024.01.04
나무 나무 오래 산 나무 한 그루 해를 향해 서 있다 몇 살인지 모르겠다 오순도순 구멍 뚫려 있다 몇 마리 새 둥지 틀고 있다 까딱까딱 모이 먹이고 있다 2021년 11월호 자작시 2024.01.04
밤송이 밤송이 살뜰히 품었던 단단한 속내, 제 몸 같았던 자식까지 다 내준 사람은 알지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 몸으로 거역하며 추상같은 가시를 만들고 흔드는 가을바람에 온몸 부서져 내릴망정 꼿꼿한 가시 다시 곧추세우고 두 눈 부릅뜬 밤송이를 다시 또 본다 2021년 10월호 자작시 2024.01.04
수박에게 수박에게 뜨거운 여름 햇살 중 살구는 노란빛만 먹어 노랗고 가지는 보랏빛만 보듬어 보라색이고 오이는 초록빛만 고집해 녹색인데 수박 너는 뭐냐? 2021년 9월호 자작시 2024.01.04
무료급식소 무료급식소 자식보다 어린 어미새가 어미보다 늙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탑골공원 여름날 오후 햇빛은 눈가 주름살 위로 떨어지고 바람은 검게 탄 팔뚝을 희롱한다 켜켜이 쌓인 세월과 달빛을 닮은 저 미소 고픔과 베풂은 이음동의어다 2021년 8월호 자작시 202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