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245

먼저 온 오후

먼저 온 오후 태양이 긴 혀를 늘어뜨리는 오후다 적도의 늙은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다 황하의 장마가 비를 몰고 오는 오후다 햇볕이 꾸들꾸들 말라가고 바람이 포플러 잎사귀를 희롱하는 오후다 망치소리 끊긴 오후다 윤슬이 반짝이고 지친 개가 헐떡이는 오후다 토방 위의 개미가 안방으로 기어오는 오후다 신화 속의 거인들이 역사책의 활자를 잡아먹고 마침내 똬리 틀고 앉아 있는 오후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오전보다 먼저 온 오후다 2020년 9월호

자작시 2021.02.01

분수

분수 닿을 수 없는 곳은 없다는 듯 그리움도 솟구치면 잡을 수 있다는 듯 대추나무 가지 끝의 매미 울음처럼 일제히 달려들지만 염천 하늘은 높기만 하여라 잠자리 높이만도 닿기 어려운 길 눈 부릅뜨고 다시 일어서는 일 부실한 다리는 통증으로 떨 때 개구쟁이들이 신발 벗고 응원하고 흰구름이 마중해도 아늑하여라 분수는 지금 제 몸을 시험해보는 중이다 떨어져도 밀어내도 다시 일어나는 일 허리를 꺾어 눈물로 참아내는 일 땀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2020년 7월호

자작시 2021.02.01

성북천, 봄

성북천, 봄 하얀 솜뭉치 검은 솜뭉치 두 뭉치가 아장아장 봄날 성북천을 걷고 있다 두 솜뭉치가 주인이다 검은 비닐봉지를 든 주인 하녀는 안절부절 방향잡기에 바쁘다 성북천 물길이 상전이 된 개를 인도하고 잔바람이 성당 종소리를 몰고 오면 고양이들은 하나 둘씩 기지개를 켜고 일곱 마리 새끼를 거느린 어미오리는 바쁘디 바쁘다 오가는 사람들은 늦으면 안 된다는 듯 햇살을 놓치고 노란 꽃잎 접는 영춘화를 잊는다 하얀 솜뭉치와 같은 신발을 한 아이가 봄바람을 타고 두둥실 왜가리는 물고기 찾아 두둥실 아래를 향하는 성북천은 무심한 듯 구름만 안고 흐르고 2020년 5월호

자작시 2021.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