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오후 먼저 온 오후 태양이 긴 혀를 늘어뜨리는 오후다 적도의 늙은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다 황하의 장마가 비를 몰고 오는 오후다 햇볕이 꾸들꾸들 말라가고 바람이 포플러 잎사귀를 희롱하는 오후다 망치소리 끊긴 오후다 윤슬이 반짝이고 지친 개가 헐떡이는 오후다 토방 위의 개미가 안방으로 기어오는 오후다 신화 속의 거인들이 역사책의 활자를 잡아먹고 마침내 똬리 틀고 앉아 있는 오후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오전보다 먼저 온 오후다 2020년 9월호 자작시 2021.02.01
소쩍새 울다 소쩍새 울다 소쩍새 솥 적다고 울고 뻐꾸기 앞산에서 무시로 울 때 우는 그대 보고 나도 운다 그대여 익기도 전에 떨어진 땡감 눈물로 거두며 사는 일 누가 알리 어느 곳엔가 묻혀 그대 가슴속에 사는 이 통증 오늘도 소쩍새 뻐꾸기는 울기만 하는데 2020년 8월호 자작시 2021.02.01
분수 분수 닿을 수 없는 곳은 없다는 듯 그리움도 솟구치면 잡을 수 있다는 듯 대추나무 가지 끝의 매미 울음처럼 일제히 달려들지만 염천 하늘은 높기만 하여라 잠자리 높이만도 닿기 어려운 길 눈 부릅뜨고 다시 일어서는 일 부실한 다리는 통증으로 떨 때 개구쟁이들이 신발 벗고 응원하고 흰구름이 마중해도 아늑하여라 분수는 지금 제 몸을 시험해보는 중이다 떨어져도 밀어내도 다시 일어나는 일 허리를 꺾어 눈물로 참아내는 일 땀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2020년 7월호 자작시 2021.02.01
성북천, 봄 성북천, 봄 하얀 솜뭉치 검은 솜뭉치 두 뭉치가 아장아장 봄날 성북천을 걷고 있다 두 솜뭉치가 주인이다 검은 비닐봉지를 든 주인 하녀는 안절부절 방향잡기에 바쁘다 성북천 물길이 상전이 된 개를 인도하고 잔바람이 성당 종소리를 몰고 오면 고양이들은 하나 둘씩 기지개를 켜고 일곱 마리 새끼를 거느린 어미오리는 바쁘디 바쁘다 오가는 사람들은 늦으면 안 된다는 듯 햇살을 놓치고 노란 꽃잎 접는 영춘화를 잊는다 하얀 솜뭉치와 같은 신발을 한 아이가 봄바람을 타고 두둥실 왜가리는 물고기 찾아 두둥실 아래를 향하는 성북천은 무심한 듯 구름만 안고 흐르고 2020년 5월호 자작시 2021.02.01
대숲, 바람 대숲, 바람 얼마를 더 비워야 네 속같이 될까 얼마만큼 더 참아내야 네 껍데기 닮을까 대나무 숲에 사는 바람은 조그만 사각거림에도 죄스럽다 하는데 <뷰티라이프> 2020년 2월호 자작시 2020.04.01
그림자 찾기 그림자 찾기 그는 무엇인가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외눈이었으며 한쪽 눈으로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했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으면서도 옷매무새를 고쳤다 오래된 잡기장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렁그렁 쇳소리 나는 울음을 토했다 아니 노래였다 눈이 땅에서 하늘로 .. 자작시 2020.04.01
수탉과 지렁이 수탉과 지렁이 지렁이 한 마리 비 그치자 외양간 앞을 느리게 기어가고 있다 얼핏 비치는 햇살에 투명한 속살 더 환하다 저렇게 온 속을 다 보이고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옷 칭칭 동여매고 툇마루에 앉아 비상을 꿈꾸는 사이 때론 저렇게 머리 가슴 배 모두 비워내고 무작정 꿈틀대고 싶어.. 자작시 2020.04.01
내기 게임 내기 게임 생은 내게 두 가지 규칙을 내건 게임을 제안, 제시했다 (다음 판은 액수가 두 배로 커지고 판돈이 바닥날 때까지 해야 한다는 것) 결과가 뻔한 게임 고도의 속임수 삶은 이처럼 결과가 훤한 게임을 제안하고 슬쩍 슬쩍 약을 올리고 있다 슬금슬금 다가서는 너 스톱을 외치지 못하.. 자작시 2020.04.01